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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증받은 장기/년도신장 / 2009
  • 등록일202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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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19일 오전 11:45분, 우리 집 둘째 다재가 태어났다.



첫째 연재는 너무나 건강히 잘 크고 있어서 사실 분만하는 순간까지도 아무걱정 안하고 있었다. 태어났다는 신호가 나왔고, 한참이 지나도 보호자를 불러 아이를 보여주질 않는다.



약간의 불안감이 엄습하는 가운데, 드디어 보호자인 아빠를 찾는다. 대학병원엘 가야할 것 같다고 한다. 폐가 덜 펴져서 응급실에 가야한다고…. 서둘러 인천에 있는 대학병원엘 갔다.



대학병원으로 이송되기 전까지 나는 가족들에게 갓 태어 난 둘째딸의 상태에 대해 차마 말하지 못했다. 결국 엄마는 아이 없이 산후조리원에 있다가 퇴원을 했다. 매일 수유할 분량만큼의 모유를 짜서 아이스박스에 넣어 다른 대학병원으로 나르는 생활 30일 만에 우리는 퇴원을 했다.



퇴원 후 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다가 16개월쯤 되었을 때 열이 나서 해열제와 감기약을 2일정도 먹였는데, 몸이 약간 붓는 것 같아 병원을 갔다. 담당의사는 “이러면 안 되는데~”하면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서울대학교병원으로 가보라면 소견서를 써주었다.



그때부터 어린 딸아이의 복막 투석이 시작되었다.



보통 밤에 투석을 시작하면 아침까지 하게 되는데, 아침이면 퀭한 눈과 뼈에 늘어져 있는 피부가 탄력을 상실한 채로 달려있어 마치 에티오피아 어린이 같았고, 저녁이면 하루 동안 소변배출이 안되어 몸에 쌓이다 보니 맹꽁이같이 몸이 퉁퉁 부었고, 쌕쌕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배출이 원활하지 않다보니 자연스레 먹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갈증이 나서 물을 찾으면 한번에 1~2 숟가락 정도만 먹였고, 국은 아예 먹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국은 미역국 말고는 안 먹는다.



더 힘든 일은 3살 터울 언니가 있는데, 맘 놓고 간식을 먹이지 못했다. 앞에서 먹이면 자기도 달라 떼를 쓰기 일쑤여서 과일 등의 간식은 몰래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서 먹였다.



과일을 먹이면 오후에 또 힘들어 하니 한 번에 한입정도 먹이는 정도였다. 자연스레 큰아이는 숨어서 간식을 먹거나, 자연스레 자제하는 분위기다 보니, 한참 먹는 것을 좋아할 나이에 참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애기 때부터 그렇게 절제된 생활을 시키다 보니, 지금은 먹는 욕심이 많다. 내 눈앞에서 없어지기 전에 일단은 먹고 본다. 보통은 맛없는 걸 먼저 먹고, 맛있는 거는 마지막에 먹는데, 다재는 제일 맛난 거를 먼저 먹고, 나눠 먹으라 말해도 자제가 안 된다. 어려서부터의 환경이 지금의 다재를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투석을 시작할 당시 장기이식 대기자 신청도 같이 했었다. 투석을 시작한지 10여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뇌사자가 있어 대기순서 2번이니 입원할 짐 챙겨놓고 대기하라는 전화였다. 전화를 못 받을까봐 잠도 못자고 뜬눈으로 지새웠지만 날이 밝아도 연락은 없었다.



결국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버티다가 결국 아내가 결단을 내렸다. 엄마의 신장을 다재에게 주기로 한 것이다. 부모의 장기는 마지막 보루라 했지만, 너무 어린 아가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다재는 그 무렵, 치아도 힘이 없고 신체기능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결단의 순간이었다.



이식전 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다. 신장 투석실 장재연 간호사님선생님으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이름이 우리 큰아이 이름을 거꾸로 한 것과 같아서 기억을 하고 있다. 다재가 식사 시간도 맞춰야 하고, 음식도 가려야 해서 힘들었는데 본인 아이에게 주려고 만든 이유식을 매일 싸와서 챙겨 주었다. 근무가 끝나고 이유식을 만드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환자에게 나눠주려고 이유식을 챙기는 그 마음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눈물 나게 고마운 순간이었다.



다행히도 이식은 성공적으로 되어 본인이 주의만 하면 건강상태는 좋았다. 이제야 좀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아이가 눈 마주침이 또렷하지 않았다. 이제는 안과를 찾아 헤매 다녔다. 서울대학교병원 본원과 분당을 오가며 치료를 한다곤 했지만, 막상 해줄게 없다고 하신다.



다재가 태어날 때 중환자실에서 30일정도 입원을 했는데, 그때 어디선가 인공호흡기를 1주일 이상 착용하고 있으면 뇌의 어느 부분이 손상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다재는 시신경 장애를 입어 딱히 해줄게 없고 앞으로도 어느 정도 더 보일지 덜 보일지 판단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어린이집은 집근처 있는 복지관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소근육 재활치료 등을 병행 했다. 투석 때문에 거의 누워있어야 했고, 외출은 생각지도 못했다. 시력이 현저히 떨어져 눈으로 보고 따라하는 학습이 잘 안되었다. 소근육, 대근육 발달이 다른 아이에 비해 늦어지고 있었다.



6살이 되어 취학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안과에서는 종로에 있는 맹학교에 가서 조언을 받으라고 했다. 막상 그곳에 가서 상담을 하고 학교를 둘러보는데, 맘이 편치 않았다. 그나마 조금 보이는 시력도 여기에서는 퇴화되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맹학교는 포기했고, 유치원은 복지관 특수반에, 초등학교는 언니가 다니는 일반학교로 보냈다.



초등학교 생활은 3살 위인 언니에게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태어나면서 병원 생활을 많이 하다 보니 사용하지 않은 근육들로 발달이 조금 늦었다. 근육 발달이 늦다보니, 화장실 뒤처리가 불안했고 4학년인 언니는 쉬는 시간마다 다재네 교실을 찾아가 화장실에 데려갔다. 선생님께 동생이라고 인사도 시키고 다재교실에 갈 때마다 수시로 친구를 바꾸어 데리고 가서 동생을 소개하며 다재의 인맥을 만들어 주었다. 졸업 즈음에는 학원에 같이 다니는 친한 후배들에게 부탁하였고, 그렇게 해야 자기가 졸업해도 다재가 편할 것 같아 작전상 그리 했다고 한다.



지금도 다재는 본인 친구보다 언니 친구나 선배를 더 많이 알고 있다. 모두 착해서 다재가 톡을 보내면 답을 해 주는 좋은 선배들이다. 큰딸은 사춘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불편한 동생을 창피하다 여기지 않고, 끔찍이 위해주며 학교생활을 잘 이끌어주었다.



다재 이식 후 벌써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식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계속해서 면역 억제제를 먹어야 하고, 다재는 언젠가 또다시 예전의 힘든 시간을 맞을 수도 있다.



나는 부모로써 태어날 때 건강히 태어나게 하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하다. 건강히 태어나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인데, 장애를 안고 태어난 우리 다재가 사회복지가 좋아진다 한들 부모가 한평생을 봐 줄 수가 없기에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아픈 자식을 두고 먼저 눈을 감아야 하는 부모들은 같은 심정일 것이다.



작년 겨울 어느 날 새벽, 잠이 오지 않아 TV를 돌리다가 우연히 다큐3일이라는 프로그램에 다재 주치의 선생님인 하종원 교수님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생명의 소리 합창단"도 소개되고 있었다.



자막이 지나갈 때 폰으로 사진을 찍어놓고, 아침에 아내와 그 얘기를 하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지금은 다재와 엄마, 아빠 모두 합창단에 함께하게 되었다.



다재는 노래를 좋아해서 지역의 소년소녀합창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바쁜 행사 일정과 율동이 많아 부모로서는 걱정이 되었다. 얘기는 안 해도 다소 느리거나 어눌한 동작이 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 생명의 소리 합창단에도 율동이 있긴 하지만 늘 배려해주는 모습에 다재도 기분 좋게 다니고 있다.



 



올 해 경주에서 있었던 대한이식학회 초청공연은 우리에게 너무나 뜻깊은 행사였다. 아시아 이식학회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리셉션에 초청받았는데 우리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우리 차례의 공연이 끝난 후, 사회자가 특별한 기쁨을 우리에게 준 것이다. 이식수혜자로 다재를 소개해 주셔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는데 다재가 소개되는걸 보고 민상일 교수님이 달려와서 아는 척을 해준 것이다.



원래 다재 주치의였던 민상일 선생님이 미국 연수를 가게 되어 하종원 교수님으로 바뀌었다. 다재도 너무 반가워하고, 우리에게는 사소할지도 모르는 민교수님의 아는 척이 너무나 감사하고, 뿌듯했다.



주치의신 하종원 교수님과 민상일 교수님, 모두 다재의 생명을 유지해 주시는 고마운 분들이다.



병원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답이 없는 생활에 분위기 다운되고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그저 평범하게 걷고, 숨 쉬고, 먹을 수 있는 게 꿈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이제 바라는 점은 가족과 마지막 그 순간까지 건강할 수 있는 한 건강히 재미있게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앞으로 어떤 시간이 닥쳐와도 지금처럼 지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생명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 가족, 앞으로도 기증자 가족 분들과 함께 생명나눔이 많이 이뤄지도록 함께 노래할 것이다.



2009년 신장 이식 수혜자 다재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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